#PM2:00

서울 중구 남대문로 ‘이주노동자방송국’ 사무실. 마붑 알람(29·방글라데시)은 뉴스대본에서 눈을 떼고 시계를 흘낏 봤다. 녹화까지 1시간. 슬슬 ‘아나운서’들이 올 때다.

오늘은 이주노동자의, 이주노동자에 의한, 이주노동자를 위한 ‘다국어 이주노동자뉴스’ 녹화가 있는 날. 방글라데시·네팔·몽골·미얀마·영어의 5가지 언어로 한국의 최신 뉴스와 이주노동자 관련 소식을 전하는 1시간짜리 프로그램이다. 8월부터 2주에 한번씩 방송했으니, 4번째 방송 녹화다. 마붑은 뉴스를 제작하는 이주노동자방송국 공동대표이자, 방글라데시어 아나운서다.

#PM2:20

사무실 문이 열리고, 미누 목단(네팔)과 나라(26·몽골)가 들어섰다. 미누는 마붑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번역하느라 한 숨도 못 잤어”라고 한숨부터 쉬었다. 미누는 이주노동자들로 결성된 밴드 ‘스탑크랙다운’의 보컬. 각종 단체 행사마다 뛰어다니며 공연하랴, 틈틈이 뉴스 준비하랴, 숨쉴 틈 없이 바쁘다.

아나운서들은 녹화 이틀 전 뉴스대본을 받아 직접 자국어로 번역한다. 역시 아나운서인 윈라이(35·미얀마)가 신문·방송·인터넷을 뒤져 뉴스를 가려뽑고, 한국인 자원봉사자가 골치아픈 한자어를 쉬운 말로 고쳐 대본을 보내준다. 언어별 방송시간은 10여분. 주어진 뉴스 대본에 직접 취재한 한국내 자국 공동체 소식을 덧붙인다. 미누가 추가한 공동체 소식은 12일 네팔 추석 ‘더서이’ 행사 안내다. 1992년 ‘돈을 벌기 위해’ 한국땅에 발을 디딘 그는 고참급 이주 노동자. 13년째 봉제공장 등에서 일을 해오고 있다.

나라는 대본 옆에 두툼한 책을 펴 놓고 코를 파묻었다. 뉴스 준비 틈틈이 학교에 낼 보고서도 써야 한다. 지난해 8월부터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몽골 울란바토르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유학한 엘리트 출신. ‘노동자’가 아닌 ‘학생’이지만, 그에 앞서 ‘몽골인’이다. 나라는 “한국에 있는 나의 몽골 친구, 친척들 상당수는 불법체류자”라며 “나는 학생이지만,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나라는 “한국어 장벽 때문에 뉴스를 들을 수 없어 이주노동자 사이에선 엉뚱한 소문만 떠돈다”며 “내가, 우리나라 말로, 정확한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PM2:55

녹화시작 5분전. 네빈 도머(25·미국)는 급히 전자사전을 펴 들었다. 갑자기 뉴스 2개가 추가됐다. ‘국정감사 실시’ ‘소아입원 본인부담금 전액 면제’. 한국생활 3년째지만, ‘면제’나 ‘국정감사’ 같은 단어는 여전히 어렵다. 네빈은 3년 전 이주노동자 처우 개선 촉구 집회에서 마붑을 만났다. 평화학을 전공하고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한국에 왔지만 ‘공부’보다는 ‘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네빈은 “나는 미국인이고, 이주노동자도 아니지만 이 문제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의 영어뉴스는 한국내 인도·필리핀·아프리카 노동자들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단비다.

시민방송이 기자재 일체와 제작비 일부를 지원하지만 부족한 것은 한없이 많다. 사무실이라고 해봐야 시민방송 한쪽의 책상, 전화기, 컴퓨터 한 대가 전부다. 마붑은 “조선족, 중국인 노동자 뉴스도 해야 하는데, 무작정 ‘봉사’해 달라 할 수 없어 못하고 있다”고 씁쓸해했다.

#PM3:30

녹화 시작이 늦어지고 있다. 컴퓨터가 또 말썽을 피우는 모양이다. 미누는 ‘아나운서’다운 흰 셔츠로 갈아입고 분장을 시작했다. 아나운서는 그의 어릴 적 꿈 중 하나. ‘진짜’ 아나운서는 아닐지 몰라도, 한국 내 3,000명 네팔인은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꼭 방송해보고 싶은 뉴스는 단 하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전면 합법화됐습니다’ 바로 그것이다. 그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단속의 공포를 모른다”고 말했다. 한국생활 선배인 만큼,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와 고통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그래서 방송을 한다고, 그는 말했다.

‘버마’어 아나운서 윈라이의 가슴엔 ‘꿈의 뉴스’가 한가지 더 있다. 그에게 조국은 군사정권 ‘미얀마’가 아니라, ‘버마’(미얀마의 옛 이름)다. 윈라이는 “‘버마의 오랜 군사독재가 종식됐습니다’라고 방송하는 그날, 마이크를 내려놓고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벌써 15년째 부모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고국이라고 돌아가봐야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차디찬 감옥뿐. 군사독재 반대 운동을 하던 그는 91년 먼 망명의 길을 택해 ‘버마와 비슷한 민주화 경험이 있는’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 내 버마 민주화 동지들과 지난해 ‘버마행동’을 결성해 멀리서나마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그는 현재 한국정부에 난민 지위를 요청해 놓은 상태다.

#PM3:50

녹화가 시작됐다. 마붑이 뉴스데스크 앞에 앉았다.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난 4월 ‘이주노동자방송국’을 만들었지만, 동료 3명이 불법 체류자로 적발돼 추방됐다. 공동대표 중 1명은 조여오는 단속의 불안에 눈물을 머금고 자진 출국했다. 절망적이었다. 과연 우리가, 이 방송을, 할 수나 있을까. 그러나 방송은 시작됐고, 횟수가 늘어날수록, 격려가 쏟아졌다.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리는 동포들에게 전달해야 할 소식은 오늘도 하늘의 별만큼 많다.

4, 3, 2, 1, Q!

“한국에서는 수확의 계절인 가을의 풍요로움을 상징해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고 합니다. 저희도 오늘 풍성한 소식을 가지고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뉴스는 매달 2·4주 화요일 밤 11시 스카이라이프 154번 채널이나 인터넷 mwtv.or.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첫번째 소식입니다…”